아래는 2019년 나이키가 진행한 캠페인 ‘2019 우먼스 저스트 두잇’의 슬로건입니다. 여성들을 위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이 캠페인과 함께 공개된 슬로건 디자인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정직하고 반듯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역동적으로 보이는 이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은, 디자인 스튜디오 ‘구테폼’의 작품입니다.
기본적으로 굵고 가독성이 좋은 산세리프 서체를 사용하며 ‘너’와 ‘믿’의 장평을 가로로 길게 늘린 형태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으로,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디자인은 꽉 차게 채운다는 규칙만 지키면 되기 때문에, 어떤 매체든 ‘너’와 ‘믿’의 장평을 자유자재로 변형시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캠페인에 사용되는 수많은 홍보매체들을 고려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죠.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여성들의 도전정신을 응원하는 나이키의 메시지를 잘 담고 있는 디자인입니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은 단순하게 글자를 예쁘게 꾸미는 일을 벗어나, 글자 안에 담은 브랜드의 메시지를 시각적인 요소들로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이, 최근에는 어떤 트렌드를 보이고 있을까요?
들어가기 전에,
디자인 서체의 표준 ‘헬베티카’
현대의 영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서체, 바로 헬베티카(Helvetica)입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너무 당연하게 들어봤을 이름이죠. 그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베티카는 기업이나 브랜드의 CI와 BI도 물론이고, 도로의 표지판이나 안내 책자 등 일상 속에서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헬베티카 서체에는 스위스 모더니즘에서 비롯된 ‘스위스 모던 타이포그래피 양식’이 담겨 있습니다. 서체의 형태에 있어서 보이는 아름다움이나 디자이너의 주관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죠. 그래서 가장 중립적인 감정을 가진 산세리프를 기본으로 하고, 수평과 수직의 균형을 고려한 그리드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 특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간단하고 명료한 ‘실용주의 서체’.
서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적기 때문에 신뢰와 정확의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의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디자이너들은 간혹 창의성에 한계를 두는 폐쇄적인 서체라며 헬베티카 사용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체는 전 세계 어디든 무리 없이 쓰이고 있답니다. (아이폰의 전용 서체로도 유명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서체가 지면을 벗어나 다양한 매체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기면서, 헬베티카 서체 자체의 사용은 살짝 주춤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에 최적화된 서체로 나온 Verdana, Rovoto 등의 서체들도 헬베티카가 가지고 있던 특징들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이 헬베티카의 양식 자체는 영원할지도 모르겠네요.
감성을 자극하는 ‘타이포그래피’
손으로 쓴 듯한 느낌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은 기술의 발전에 따리 점차 사라졌지만, 최근 옛날 감성을 자극하는 트렌드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신속하고 완벽하게 생산되는 현대 기술의 산물에 대조적으로, 느리지만 손으로 한 땀씩 만들어 내는 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아주 특별하죠. 이런 스타일이 유행하는 흐름은,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반작용적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감성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하는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거나 전통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은 브랜드에 있어서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남양유업에서 선보인 백미당(百味堂) 브랜드의 로고 디자인입니다. 손으로 직접 쓴 듯한 클래식한 느낌이 특징입니다.
반듯하고 기계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부드럽고 고전적인 스타일이 잘 느껴지는 디자인을 사용하여, 소비자의 향수를 자극하며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수제 타이포그래피로 브랜드 정신을 아주 잘 담고 있는 사례입니다.
이런 타이포그래피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던 산세리프 서체와는 다르게 서체 자체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술적인 면이 부각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브랜드 이미지 전달에 오류가 생기고 신뢰감을 잃을 위험이 있죠. 이를테면, 현대 기술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 전자제품 기업이 감성적인 손글씨를 사용하게 된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모션 그래픽이 가미된 ‘움직이는 서체’
타이포그래피의 가장 큰 매력은, 그 본질은 언어에 있으면서 ‘시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로 듣는 언어보다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언어는 보는 사람의 집중도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죠. 타이포그래피는 이제 모션 그래픽 디자인의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애플의 여러 광고 중, ‘Don’t Blink’는 각종 패러디 영상도 나올 만큼 화제였습니다. 광고 내용은 단순합니다. 가독성 좋은 산세리프 서체들에 빠른 모션을 적용하여 신제품을 설명하죠.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기도 하지만, 혹시나 읽지 못했어도 괜찮아요. 글자들이 빠르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재미있는 영상미에 눈을 뗄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상은 그 목적을 다하고 있습니다. 글자들이 정보 전달의 목적을 넘어서 시각적인 재미까지 주는 디자인의 성격까지 담고 있는 겁니다.
당시 애플에 이어서 삼성도 모션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한 광고을 선보였었습니다. 바로 갤럭시 S10의 광고였는데요. ‘미래를 펼치다’라는 슬로건을 이용해, 글자들이 다양한 곡면들을 따라 천천히 돌아가고 펼쳐지는 모션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만들어진 영상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잘 읽힐지 몰라도 아마 외국인은 이 슬로건을 읽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화려함과 재미라는 시각적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이죠. 이 영상에서 가독성만큼 중요한 건 트렌디함과 느낌, 그리고 감각입니다.
디자인은 시대에 따라서 빠른 변화를 겪습니다. 물론 타이포그래피 디자인도 디지털 시대에 따라 감성적인 측면에서, 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쇄술에서나 사용되던 평면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이, 이제는 지면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좀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타이포그래피에도 오감을 활용한 디자인 적용이 매우 가까워진 듯 보입니다.
written by 브랜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