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화장품 업계에 작은 지진이 일었습니다. 로레알이 호주의 스킨케어 브랜드 ‘이솝(Aesop)’을 25억 달러에 인수한 것. 뷰티 업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25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은 이솝은 그 흔한 TV 광고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유명 모델 기용도, 화려한 마케팅 캠페인도 전무했습니다. 대형 뷰티 브랜드들이 보통 매출의 30%가 넘는 돈을 마케팅에 쏟아붓는 현실에서 이솝은 사실상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로레알의 이솝 대형 인수 소식은 마케팅 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국내 중소기업과 스타트업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큰돈을 쓰지 않고도 위대한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인데요.
브랜코스가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비결을 해부해 드리려 합니다. 37년간 한결같은 철학으로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된 이솝의 숨은 전략을 통해, 우리 기업들이 대입해 볼 수 있는 브랜드 마케팅 방법론들을 해설해 드립니다.

(사진 : 이솝 공식몰)
1. 침묵의 힘 – 언셀링(Unselling) 전략
광고하지 않는 브랜드의 역설
이솝의 창업자 데니스 파피티스는 기존 화장품 업계의 과장된 약속들에 진저리를 쳤다고 합니다. ‘기적의 효과’, ‘영원한 젊음’ 같은 오그라드는 문구들. 그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것, 바로 ‘언셀링(Unselling)’ 전략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름을 없애준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제품을 만들어 고객이 직접 경험하게 합니다.”
이솝은 제품의 효능을 과장하는 대신, 성분과 제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습니다. 고객을 현명한 소비자로 존중한 것이죠. 놀랍게도 이런 정직한 접근은 오히려 더 강력한 신뢰를 만들어 냈습니다.
✅ 우리 기업이 배울 점
사실 많은 국내 스타트업, 중소기업들도 마케팅 예산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이걸 굳이 약점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솝처럼 오히려 ‘진정성’이라는 무기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죠.
예를 들어, 제품 개발 과정을 블로그나 SNS에 솔직하게 공유해보는 건 어떨까요? 실패한 시제품 이야기, 개선 과정의 고민들을 나누다 보면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브랜드의 팬이 됩니다. 그리 특별한 전략도 아닙니다. 이미 크라우드펀딩에 성공한 수많은 국내 브랜드들이 활용한 방법이기도 하거든요.

꿀 같은 텍스처의 리플레니싱 젤 (사진 : 이솝 공식물)
2. 공간의 재해석 – 매장을 문화 공간으로
400개 매장, 400개의 이야기
이솝 매장들은 놀랍게도 전 세계 400여 개 매장이 모두 다른 모습을 지녔습니다. 서울 서촌 매장은 한국 전통 가옥의 차면시설인 ‘파라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싱가포르 매장은 페라나칸 문화를 담았습니다.
단순히 ‘다르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각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그 안에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함입니다. 이솝은 매장을 ‘판매 공간’이 아닌 ‘문화적 목적지’로 활용하고 있는거죠.
✅ 작은 공간도 특별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이솝처럼 매장마다 건축가를 고용할 여력이 없는데요…”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꼭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 국내 독립서점은 매달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며 공간을 갤러리로 활용합니다. 어떤 카페는 동네 주민들의 오래된 사진을 모아 벽면을 꾸몄죠. 이런 작은 시도들이 쌓여 그 공간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중요한 건 ‘획일화된 인테리어 매뉴얼’을 벗어나는 용기입니다. 프랜차이즈의 효율성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각 지점의 개성을 살리는 것이 더 강력한 브랜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해녀들이 사용했던 납 벨트, 부유 기구, 고무 잠수복과 같은 도구들에서 영감을 받은 이솝 제주 (사진 : 이솝 공식몰)
3. 오감을 사로잡는 고객 경험 설계
차 한 잔에서 시작되는 관계
이솝 매장에 들어서면 직원이 먼저 차나 과일 우린 물을 권합니다. 뭘 사라는 압박은 전혀 주지 않습니다. 모든 매장 중앙에는 세면대도 있어서 마음껏 제품을 체험할 수 있죠. 손을 씻는 단순한 행위가 특별한 의식이 됩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는 온라인에서도 이어집니다. 이솝은 간단한 설문을 통해 고객의 구매 이력과 선호도를 파악하고, 온라인에서도 매장과 같은 개인 맞춤 상담을 제공합니다.
✅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감성의 힘
우리는 종종 온라인, 디지털에만 집중하다가 정작 중요한 ‘인간미와 직접 경험’을 놓치곤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도 이솝은 아주 성숙한 브랜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술은 더 나은 인간적 경험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며.
작은 기업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객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기, 구매 후 손편지 보내기, 제품 사용법을 직접 시연해주기까지. 이런 작은 제스처들이 고객의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예를 들어 로컬 작은 빵집이라면 빵을 구매한 고객에게 다음 방문 시 사용할 수 있는 ‘커피 무료 쿠폰’을 손글씨로 써서 줍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아날로그적 따뜻함이 대형 프랜차이즈가 따라 할 수 없는 경쟁력이 될 수 있죠.

‘이솝은 새로운 매장의 장소를 찾을 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협력할 것인지 가장 먼저 염두에 둡니다. 지역과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되기보다는, 그 지역의 거리 속 한 구성원으로 조화롭게 가치를 더하는 것이 이솝의 진정한 의의입니다. 따라서 지역과 연관성 있는 디자인 요소를 활용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사진 : 이솝 공식몰, 이솝 도쿄)
4. 느리지만 확실한 성장 – 지속가능성의 가치
37년의 일관성이 만든 신뢰
이솝은 1987년 창립 이래 단 한 번도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제품이 비건이고, 비콥 인증까지 받았죠. 2030년 탄소 중립 목표도 세웠습니다. 이런 가치는 트렌드를 따른 것이 아니라, 창립 때부터 지켜온 고유한 철학입니다.
37년. 이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매출 압박과 경쟁이 치열한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죠.
✅ 작지만 꾸준한 실천의 힘
“우리는 이솝처럼 거창한 ESG 전략을 세울 여력이 없어요.” 많은 중소기업 대표님들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지속가능성은 꼭 거창한 프로젝트일 필요가 없습니다.
포장재를 하나씩 친환경 소재로 바꿔가기,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작은 캠페인 진행하기, 직원들의 워라밸을 위한 소소한 복지 늘리기 등.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브랜드의 진정성을 만듭니다.
중요한 건 ‘일관성’입니다. 한 번 시작한 약속은 어렵더라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고객과의 신뢰를 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나만의 무대, 샤워의 시간: 감각을 깨우는 세정을 즐기는 방법 (영상 : 이솝 공식몰)
🔖 작은 기업도 실천할 수 있는 이솝식 마케팅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들
이솝의 전략이 멋져 보이지만, 막상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는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정리해 봤습니다.
STEP 1. ‘언셀링’ 전략 도입하기
- 제품의 ‘기적적 효과’ 대신 정직한 성분표와 제조 과정 공개
- “우리 제품은 ○○합니다” 대신 “우리는 ○○를 위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로 전환
- 블로그나 SNS에 실패한 시제품 이야기, 개선 과정도 투명하게 공유
STEP 2. 오감을 활용한 체험 설계
- 이솝의 ‘세면대 전략’처럼, 고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 마련
- 시향지 대신 실제 제품 테스트, 시식 대신 조리 과정 보여주기
- 매장의 향기, 음악, 온도까지 세심하게 설계 (예: 제품과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 큐레이션)
STEP 3. 공간을 문화로 만들기
- 판매 공간의 20%는 ‘비판매 영역’으로 활용 (예: 지역 작가 전시, 커뮤니티 게시판)
- 매달 지역과 연계한 작은 이벤트 (예: 동네 바리스타와 함께하는 커피 클래스)
- 프랜차이즈여도 각 지점만의 시그니처 요소 허용 (예: 지역 특산품 코너, 동네 이야기 수집)
💊 역시나, 정공법이 옳았습니다.
이솝의 성공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좋은 브랜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정성과 일관성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마케팅 도구라는 것.
물론 쉽지 않은 길입니다. 당장의 매출 압박, 경쟁사의 공격적 마케팅,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하지만 이솝의 사례를 잘 들여다 봐야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묵묵히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이 결국은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래 공들인 마케팅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지근한 반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솝처럼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고객의 마음을 얻는 ‘정공법’을 시도해보세요. 시작은 작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진심을 담아 꾸준히 나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솝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성공의 숨은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