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리프는 화면이 만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 INDEX

지난번 세리프 글 마지막에서, 화면이 다른 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고 했었어요.

🔗참고: 세리프 – 올드스타일과 모던스타일

그래서 이번엔 산세리프가 화면 때문에 태어났다는 얘기를 하게 될거라고 생각했어요. 얇은 획이 화면에서 무너지니까, 그 대안으로 산세리프가 등장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자료를 찾다 보니, 타임라인이 제 생각이랑 완전히 어긋나더라고요.

200년 전의 산세리프

© St Bride Foundation

가장 오래된 산세리프로 꼽히는 글자는 18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영국의 활자 주조업자 William Caslon 4세가 만든 ‘Two Lines English Egyptian’이라는 활자예요.

이름에 이집트가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 이집트랑은 상관없어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이집트 열풍때문에 붙은 이름일 뿐이에요.

화면은 커녕 사진도, 전기도 없던 시절이에요.

산세리프는 애초에 화면을 위해 태어난 글자가 아니었던 거예요. 화면보다 100년도 더 전에 있었던 글자였어요.

환영받지 못한 시작

근데 처음 나왔을 때, 이 글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대요.

당시 이런 글자는 그로테스크라고 불렸어요. ‘기괴한’이라는 뜻이에요. 수백 년 동안 세리프에 익숙해진 눈에는, 삐침도 없고 반듯반듯한 글자가 뭔가 덜 갖춰진 것처럼 보였던 거죠.

그래서 산세리프는 오랫동안 본문에 쓰이지 못했어요.

지금 보면 가장 깔끔하고 현대적인 글자가, 한때는 가장 무시를 받던 글자였던 거죠.

모더니즘이 다시 꺼낸 글자

20세기 초,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장식을 걷어내고 기능만 남기자’는 흐름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어요. 이 흐름 속에서 1927년, 독일 디자이너 파울 레너가 Futura를 만들어요.

원, 삼각형, 사각형 같은 기본 도형만으로 글자를 그린, 철저하게 기하학적인 폰트였어요.

30년 뒤인 1957년에는 스위스에서 Helvetica가 등장해요. 어떤 의미도, 어떤 개성도 담지 않고 그저 내용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그게 이 시기 산세리프가 추구한 방향이었어요.

한때 장식으로 여겨졌던 세리프의 삐침이, 이제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거예요.

화면이 산세리프를 고른 이유

그리고 다시 반세기 가까이 지나, 화면의 시대가 와요.

근데 화면이 산세리프를 만든 게 아니었어요. 이미 100년 넘게 완성되어 있던 산세리프가, 화면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우연하게도 딱 맞았던 거예요.

초기 디스플레이는 해상도가 아주 낮았어요.

지난 글에서 얘기했던 모던 세리프의 그 얇디얇은 획, 그 정교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어요. 픽셀 몇 개로 표현해야 하는 화면에서는, 획 두께가 일정한 산세리프가 훨씬 안정적으로 보였던 거예요.

1996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의뢰로 매튜 카터가 만든 Verdana는 아예 이 조건에 맞춰 처음부터 설계된 폰트예요.

작은 화면에서 뭉개지지 않도록, 화면을 위해 태어난 산세리프였던 거죠.

화면은 산세리프를 발명한 게 아니라, 골라낸 거였어요.

손이 세리프를 만들고, 기계가 세리프를 다듬고, 화면이 산세리프를 골랐어요.

근데 산세리프는 사실 그 전부터 거기 있었어요. 조용히, 200년 동안요.

시대는 계속 새 글자를 원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이미 있던 글자 중에서 답을 찾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근데 여기까지 오니까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한국의 글자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서양에서는 세리프와 산세리프가 이렇게 긴 시간을 거쳐왔는데, 우리가 매일 보는 명조체와 고딕체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한국의 세리프와 산세리프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요?


written by 디자이너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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