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인 작업을 하다 보면 세리프 폰트를 쓸 때가 있어요. 삐침 하나로 달라지는 분위기가 좋아서요.
근데 이 세리프의 삐침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아보니까, 다양한 해석들이 있더라고요.
로마 시대에 돌에 글자를 새기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모서리라는 해석과 붓으로 먼저 밑그림을 그린 다음 그 붓 자국을 따라 새기면서 생겼다는 해석, 새긴 선의 끝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고 일부러 고안했다는 해석도 있어요.
정답은 없지만 확실한 건 하나예요. 이 작은 삐침 하나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거요.
올드 스타일은 ‘손’에서 시작됐다

가장 오래된 세리프는 사람이 손으로 글씨를 쓸 때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15세기 필경사들이 넓적한 펜촉을 비스듬히 기울여 글자를 쓰던 습관이, 그대로 활자로 옮겨진 거예요.
그래서 올드 스타일 세리프는 획의 두께 차이가 크지 않아요. 펜을 기울여서 쓰면 굵은 부분과 얇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나오긴 하지만, 그 차이가 완만해요. 세리프도 각지지 않고 둥글게 이어지듯 붙어 있고요.
Garamond나 Caslon 같은 폰트를 보면, 글자 하나하나가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워요.
이런 폰트들이 지금도 책 본문에 많이 쓰이는 이유가 있어요. 획 두께가 일정해서 눈이 편안하고, 오래 읽어도 피로하지 않아요.
손이 만든 글자는, 결국 사람이 오래 읽기에도 편한 글자였던 거예요.
그 사이: 트랜지셔널 세리프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인쇄 기술이 눈에 띄게 좋아져요.
종이는 더 매끈해지고, 활자는 더 정교해졌어요. 손이 하던 일을, 도구가 조금씩 넘겨받기 시작한 시점이에요.

이 시기에 등장한 세리프가 Baskerville 폰트예요.
올드 스타일보다 획의 두께 차이가 뚜렷해지고, 기울어져 있던 축도 점점 수직에 가까워져요. 그런데 세리프 끝은 아직 완전히 각지지 않고 둥글게 이어지는 흔적이 남아 있어요.
‘트랜지셔널’이라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의 글자예요.
손의 흔적은 옅어지고 있는데, 기계의 정밀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인거죠.
그 사이에서 트랜지셔널 세리프는 굵은 획과 가는 획 사이의 대비가 올드 스타일보다 뚜렷해지면서, 고전적인 분위기는 유지하지만 한층 날카롭고 단단한 인상을 갖게 돼요.
모던 스타일은 ‘기계’가 만들었다

18세기 말, 인쇄 기술은 한 번 더 도약해요.
활자를 훨씬 정밀하게 주조할 수 있게 되면서, 손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형태가 가능해졌어요.
Bodoni나 Didot 같은 모던 세리프를 보면 그 차이가 확실해요.
굵은 획은 아주 굵고, 얇은 획은 머리카락처럼 가늘어요. 세리프는 둥근 흔적 없이 완전히 직선으로 딱 떨어지고, 획의 축도 완벽하게 수직이에요. 정말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인상을 줘요.
그래서 모던 스타일은 지금도 패션이나 럭셔리 브랜드에서 자주 보여요.

Vogue 로고를 떠올려보면 느낌이 올 거예요. 극단적인 대비가 주는 날카로움과 세련됨. 그런데 이 극단적인 대비는 동시에 약점이기도 해요.
머리카락처럼 가는 획은 작은 크기로 인쇄하면 끊어져 보이거나 아예 사라지기도 하거든요. 안보이는거죠.
인쇄가 정교해질수록 아름다워지지만, 그만큼 조건도 까다로워진 글자였던 거예요.
현대의 화면은 또 다른 글자를 만들었다

손에서 기계로, 그렇게 세리프는 계속 정교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어요.
그런데 화면이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만나면서, 그 흐름이 한 번 꺾여요.
모던 스타일 세리프의 그 얇은 획, 종이 위에서는 예리하고 우아했던 그 선이 픽셀로 이루어진 화면에서는 문제가 됐어요. 작은 사이즈에서는 흐릿하게 뭉개지거나, 아예 안 보이기도 하거든요.
정교함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글자가, 정작 화면 앞에서는 가장 먼저 무너지고,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화면은 다른 답을 요구하기 시작해요. 두께 차이도, 세리프도, 어쩌면 다 덜어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거죠.
그 질문 끝에서 태어난 글자가 따로 있어요. 다음에 그 이야기를 이어가 볼게요.
written by 디자이너 이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