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좀 낯선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회색 장삼을 두르고 108염주를 목에 건 키 130cm짜리 휴머노이드 로봇이 수계식을 받았습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겠습니까?”
“예, 않겠습니다.”
살에 향불을 살짝 갖다 대는 연비(燃臂)는 연등회 스티커를 붙이는 걸로 대신했고, 이름도 받았습니다. ‘가비(迦悲)’. 석가모니의 자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웃고 박수를 칩니다.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습니다. 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유정무정에 불성이 깃들어 있으니, 로봇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요.
저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짧은 영상 소식이 묘하게 가슴에 남아 맴돌았습니다.

‘위풍당당’ 수계식에 입장 중인 가비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가비 스님의 말에는 ‘무게’가 없다
처음에는 불편함인 줄 알았습니다. 기계가 종교의 자리까지 들어왔다는 게 어딘가 낯설어서. 정확히 말하면 ‘이건 좀 오버 아닌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린 포인트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가비 스님이 “예, 않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그 장면이 핵심입니다.
가비 스님은 ‘않겠다’는 약속을 못 지킬까봐 1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못 지키면 어쩌지.’ 이런 생각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겁니다. 그저 인풋을 넣은 생산자(?)에게 학습된 대로, 정답을 출력했을 뿐이죠.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달랐을 겁니다. 우리가 보통 누구한테 “거짓말 안 하겠다”고 말할 때에는 (일반 사람이라면) 속으로 한 번쯤은 망설임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본능적인 과정 때문에 대답도 한결 무거워지죠. 템포도 약간 늦습니다. 답하기 전에 주춤, 머뭇거리고 답하고 나서도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같은 말, 같은 동작인데
한쪽은 가볍고 한쪽은 무겁습니다.
‘가짜’와 ‘진짜’가 구분되지 않는 시대
가면 갈수록 가짜와 진짜를 가려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입니다.
인스타나 유튜브만 봐도 ‘이거 이 사람이 만든 건가, AI가 만든 건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일 관련해서 자료를 찾을 때에도 ‘이 인사이트가 진짠가?’ 싶을 때도 많고요. 광고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품(광고) 만든 사람들, 정말 자기들 제품을 쓰고 있을까?’
언뜻, 그 순간만 보면 잘 구분이 안 됩니다. 가비 스님의 합장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듯, AI가 쓴 글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긴 됐을 겁니다. 학습된 친절도 친절은 친절이니까요. AI로 찍어 낸 정보도 정보라는 건 다름이 없을 테고요.
그러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기네요.
그럼, 진짜는 왜 필요한가?
가짜가 진짜만큼, 그에 준하는 효과를 낸다면 굳이 진짜를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AI가 쓴 위로의 말로도 누군가가 위안받을 수 있다면, 사람이 직접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 쉽게 답이 나오는 질문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결혼식 신부’
결혼식 신부를 예로 들어 볼게요.
신부가 부모님께 편지를 읽는 순서가 있죠. 신부가 편지를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울먹이느라 한 줄 읽고 멈추고, 또 한 줄 읽고 멈추고. 식장 안의 모두가 함께 숨을 죽이고 그 멈춤을 견뎌냅니다. 그냥 바라만 보는 사람도, 같이 우는 사람도, 손수건을 꺼내는 사람도 보입니다.
만약 신부가 그 편지를 또박또박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누군가 대신 대독해줬다면 어떘을까요. 딕션도 정확하고, 호흡도 안정적이고, 누가 봐도 잘 읽었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내용은 더 잘 전달됐을지도 모릅니다.
‘분위기’나 ‘낭만’은 달랐을 겁니다. 식장의 사람들이 함께 멈추는 그 분위기. 그건 신부가 흔들렸기 때문에, 자기를 어쩌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어쩌면 낭만같은 추억입니다.
진짜라는 게 어쩌면 거창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들리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분위기가 있다는 그 정도? 그런데 그 분위기라는 게 어설픈 흉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가비 스님이 아무리 정교해지고 고도로 발달한다고 해도, 흔들리는 사람의 감정 시늉까지는 완벽히 해낼 수 없을 겁니다. 심장이 없으니까요.
흉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AI가 쓴 위로도 위로고, 가비 스님의 합장도 누군가에게는 위안이 됩니다. 다만 진짜만이 만들 수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사람이 남게 될 자리
흉내가 잘하는 영역은 빠르게 흉내로 채워집니다. 이미 채워진 것들이 많죠. 위로의 말은 AI가 더 잘 쓸 거고, 친절한 응대는 챗봇이 더 빈틈없을 거고, 정확한 답은 학습된 프로그램이 더 빨리 내놓을 겁니다.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만든 사람도 당연히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자리에 사람이 남아있을 이유는 점점 줄어들 겁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 왜 남게 될까요.
- 결혼식 신부의 멈춤 같은 자리.
- 친구가 위로의 말이 안 떠올라서 그냥 옆에 앉아 있는 자리.
- 어떤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자리.
- 그러니까 자기를 어쩌지 못한 채로 누군가 앞에 서는 자리.
이런 자리가 사람의 자리로 더 또렷해질 겁니다. 가비 스님 같은 휴머노이드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나겠죠.

우린 지금 어떨까?
여기까지 쓰다 보니 브랜드, 마케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직업은 마케터입니다. 브랜드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연결하는 일을 합니다.(관련 글 : 마케팅이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
가만히 보니 브랜드가 하는 말도 가비 스님의 영혼없는 대답(?)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자주 하잖아요. “고객을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만듭니다.” “함께 성장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가비 스님의 “예, 않겠습니다”와 어딘가 꽤 많이 닮았습니다.
그 말의 무게를 진짜로 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좋은 말을 잘 골라낸 것뿐인지. 언뜻 처음에는 그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무게와 진심은 결국에 드러납니다.
개인적으로 앞으로 흉내 잘 내는 브랜드가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봅니다. AI가 그럴싸한, ‘진정성 있어 보이는 카피’를 너무 잘 써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흔들리면서도 자기 자리를 굳건히 찾아가고 있는 브랜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모를 때 모른다고 말하고, 실패했을 때 실패했다고 말하는 브랜드. 매끈하지 않아도 자기 색을 잃지 않는 브랜드.
이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지치지 않도록 러닝메이트가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매끈한 결과물을 빨리 뽑는 일은 점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가지만 한 사람의, 한 브랜드의 묵직한 발걸음을 함께 견디는 일은 여전히 시간이 걸리고 자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게 이 일의 약점이 아니라 남아있을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합장 중인 가비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다시, 그 합장 앞에서
가비 스님 영상을 처음 봤을 때 뭔가 미묘했던 마음이 한결 정리됐습니다.
가비 스님은 스님대로(?) 자기 자리에 있고, 저는 저대로 흔들리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 서지 않을 겁니다. 가비 스님은 스님이 잘하는 자리를 찾아갈테고, 우리는 우리 밖에 못 만드는 자리에 남아있겠죠.
그 자리가 어디인가는 앞으로 꽤나 헷갈릴 것 같긴 합니다. 깔끔한 것에 끌리고, 빠른 것에 끌리고, 망설임 없는 것에 끌릴 때마다 헷갈리겠죠. 그래도 가끔, 어딘가에서, 진짜 사람의 끌림 앞에 늘 멈춰 서지 않을까요.
내 자리는 여기였구나. 하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