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여백에 집착하게 된 게

📌 INDEX

디자인 작업물을 보여줬을 때 클라이언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여기 뭔가 비어 보여서 아쉬운 것 같아요.”
👨🏽‍💻”조금 더 꽉 차 보이면 좋지 않을까요?”
🧑🏼‍💻”내용이 조금 더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잠깐 흔들렸다. ‘그냥 채우면 되나?’ 싶었는데, 막상 채워보니 뭔가 어색했다.

분명히 정보는 더 많아졌는데, 오히려 더 읽기 싫어지는 느낌? 빈 공간을 채웠을 뿐인데 왜 더 답답해 보이는 걸까. 그 어색함이 자꾸 마음에 걸렸고, 여백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왜 비워야 하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병원 웹사이트 리뉴얼: 왜 웹사이트는 답답했을까?

최근 병원 웹사이트 리뉴얼하는 작업을 맡게 되었다.

이미 충분한 전문성과 신뢰를 갖춘 병원이었지만, 웹사이트는 조금 달랐다. 인덱스부터 서브페이지까지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고, 치료 프로그램, 의료진 소개, 인포그래픽, 공지사항까지 모든 요소가 동시에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병원이 가진 전문성과 분위기는 분명 좋았지만, 디자인이 그 신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였다.

내용이 많다고 신뢰가 쌓이는 게 아니었다. 시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어버리면, 중요한 내용을 찾지 못한 채 그냥 스크롤만 내리게 된다. 읽지 않은 게 아니라, 읽을 수가 없었던 거다.

사람 눈은 생각보다 게으르거든

우리 눈은 한 번에 모든 걸 처리하지 않는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경로가 따로 있고, 그 흐름을 방해받으면 뇌는 금방 피로해진다.

사실 “읽고 싶다”는 마음 자체도 디자인이 만들어주는 거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눈이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는 구조가 없으면, 읽고 싶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는다.

여백은 그 흐름을 만들어주는 장치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이동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말 없이 알려준다. 마치 길을 걸을 때 표지판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는 방향이 있는 것처럼. 디자이너가 여백을 설계할 때 사실은 독자의 시선 경로를 설계하고 있는 거고, 동시에 “이 페이지,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을 만들어주고 있는 거다.

중요한 게 너무 많으면, 결국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거야

병원 사이트에서 봤던 것처럼, 강조하고 싶은 게 열 개라면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강조는 주변과의 대비에서 생기는 거니까. 텍스트가 빼곡하게 차 있으면 그 안에서 어떤 문장도 돋보이지 않는다. 볼드체도, 컬러도, 큰 폰트도 주변이 다 같은 밀도면 결국 다 똑같이 보인다.

여백은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보이게 만드는 배경이다.

갤러리에서 그림 하나하나 사이에 충분한 간격이 있어야 작품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정보도 마찬가지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읽힌다. 클라이언트 입장에서 “전달하고 싶은 게 많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모든 걸 다 보여주려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묻혀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왜 신뢰가 가는 브랜드일수록 여백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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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홈페이지를 생각해보면, 제품 하나에 화면 전체를 쓴다. 설명은 짧고, 여백은 넓다. 고급 브랜드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처음엔 그냥 “트렌디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건 심리적인 전략에 가깝다.

여백이 많은 디자인은 “우리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돼”라는 자신감을 준다.

반면 모든 공간을 채우려는 디자인은 불안해 보인다.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오히려 신뢰를 덜 주는 것처럼. 병원이라는 업종은 특히 신뢰가 핵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정보를 쏟아내는 순간 그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문성은 많은 말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만 남기는 데서 드러나니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을수록, 덜어내는 연습이 필요한 이유다.

여백은 비어있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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