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anger)의 쓸모

📌 INDEX

가끔, 아주 종종 클라이언트로부터 무리한 요청이 들어오는 순간이 종종 있습니다. 일정이 도저히 맞지 않는 요구, 처음 합의했던 범위를 훌쩍 넘는 추가 작업, 혹은 “이 정도는 그냥 해주실 수 있죠?” 하는 가벼운 한마디. 그런 순간이면 마음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올라 오는 게 느껴집니다. (anger)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감정, 화(anger)

우리는 보통 화를 부끄러워합니다. 화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배우고, 화를 내는 모습은 미숙함의 표시처럼 여겨지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가 올라올 때 그것을 누르려 애씁니다. 삼키고, 못 본 척하고, 성숙한 척합니다.

그런데 화라는 감정은 누른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올라오기도 하고, 외부의 어떤 자극으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감정 자체를 거부하기는 어렵습니다. 화가 올라오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반응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화라는 감정은 묘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자극을 통해 발현되는 순간 자체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있지만, 그 화를 어떻게 발산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통제 가능한 영역에 있습니다. 발현은 막을 수 없되 발산은 다스릴 수 있다는 것. 이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화를 너무 빨리 누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회의에서는 참았다가 집에서 폭발한다거나, 이번 일에서는 삼켰다가 다음 일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그 감정이 향한다거나. 화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자리를 옮겼을 뿐인 거죠.

그래서 화에 대한 첫 번째 태도는 분명합니다. 받아들이는 것. 화가 올라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 감정이 거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화라는 ‘신호’

화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에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화가 사실은 정보라는 것.

화가 올라온다는 건 지금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신호입니다. 내 경계가 침범당했거나,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가볍게 다뤄졌거나,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이 벌어졌거나. 화는 그 사실을 가장 빠르게 알려주는 몸의 언어입니다. 이성적으로 따져보기 전에 먼저 반응하는 거죠.

이 신호가 없으면 사람은 너무 쉽게 갈려나갑니다. 무리한 요청을 계속 받아들이게 되고, 자기 시간과 노동이 가볍게 소비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일도 무너지고, 관계도 무너집니다. 화가 알려주려던 것을 듣지 않고 지나가버린 결과인 셈이죠.

그래서 화는 다스려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읽어야 할 감정에 가깝습니다. 이 화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 첫 번째 쓸모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봅시다

여기까지가 화에 대한 보통의 이야기라면, 일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다음 단계가 있습니다. 같은 자극을 다르게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청. 그 요청이 들어왔을 때, “왜 이렇게까지 요구하지?”라고 받으면 화가 올라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클라이언트가 그런 요청을 하는 이유가 정말 악의에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자기 일을, 자기 회사의 일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혹은 무언가에 대한 불안에서 나옵니다. 결과가 잘 안 나올까 봐,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시장에서 뒤처질까 봐.

그렇게 보면 무리한 요청은 사실 도와달라는 신호인 경우가 많습니다. 표현이 거칠게 나왔을 뿐, 그 안에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 두렵다는 마음,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걸 알아차리는 순간 같은 자극에 대한 감정이 달라집니다. 화가 자리하던 곳에 다른 감정이 들어섭니다. 연민에 가까운 무엇, 혹은 함께 풀어보고 싶다는 마음.

그래서 평소에 이런 생각을 늘 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내 시간과 공수를 지키면서, 동시에 상대의 마음과 의도를 어떻게, 얼마나 잘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이 두 가지를 다 잡는 길을 찾는 일. 그게 무리한 요청 앞에서 화로도 가지 않고, 무조건적인 수용으로도 가지 않는 제3의 길입니다.

협업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세

이게 비단 마케팅 실무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사람과 일하고, 의견을 주고받고, 누군가와 함께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자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회사 안에서도 그렇고,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그렇고, 팀과 팀 사이에서도,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어떤 자리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합니다.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 뒤에 있는 진짜 마음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표면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매번 화로 반응하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매번 삼키면 사람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둘 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식이죠. 결국 협업이라는 게 길게 가려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 해석이라는 한 박자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 말 뒤에 어떤 마음이 있는가? 그 한 박자를 두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이건 누구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협업이 일상인 누구에게나 필요한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관계를 지키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죠.

현상 넘어 본질에 시선을 둬야

이렇게 자극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결과물의 질이 달라집니다.

표면의 요청(현상)만 듣고 일을 하면 표면의 결과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요청 뒤에 있는 진짜 마음을 읽고 일을 하면, 클라이언트가 처음에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닿는 결과가 나옵니다. “이게 정말 제가 원하던 거예요”라는 반응은 보통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본 사람만이 가능한 결과물이죠.

이런 관점에서 저는 마케팅이라는 일이 번역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사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시장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옮기는 일. 그 번역이 잘 되려면 의뢰인의 표면적인 말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짜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를 읽는 일은, 무리한 요청 앞에서 화 대신 다른 감정을 떠올릴 줄 아는 태도와 같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근본을 들여다보는 것. 이게 일하는 사람의 성숙이고, 동시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 가장 단단한 길입니다. 화도 결국 맥락이 같은 이야기입니다. 화라는 표면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그 화가 가리키는 본질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우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화의 ‘진짜 쓸모

그래서 화의 쓸모는 두 겹입니다.

먼저, 화는 신호입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가장 빠르게 알려주는 몸의 언어. 이걸 읽을 수 있어야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화는 우리에게 해석을 멈춰 세우는 기회를 줍니다. 이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표면만 볼 것인가, 본질까지 볼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조금씩 더 나은 일을 하게 됩니다.

화는 없애야 할 감정이 아닙니다. 잘 읽고, 잘 해석하고, 그 너머의 본질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렇게 쓰일 때 화는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습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무리한 요청을 받고 화가 올라오는 분이 있다면, 그 화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화가 알려주려는 것을 천천히 들어보고, 그 자극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자리까지 한 번 가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좋은 결과가 있고, 좋은 관계가 있고, 더 단단해진 자기 자신이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정보

무심함이 마케팅에 이로운 이유 6가지

마케팅이란,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

네이버 로직 개편? 향후 분위기 예측

The Right Way

브랜드 마케팅 전문회사, 브랜코스

브랜키트-심볼_2

컴팩트 브랜드 마케팅 솔루션

브랜키드(BranKit)

브랜드 메시지 개발부터 로고 디자인, 명함 제작, 미디어&콘텐츠 실무까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보통 브랜드를 위한 컴팩트 브랜딩 솔루션, ‘브랜키트’ 출시

브랜코스_심벌(오렌지)_1000

브랜코스(BRANCOS)

브랜코스는 2015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중소기업, 스타트업 환경에 맞는

다양한 브랜드&마케팅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브랜키트-심볼_2

컴팩트 브랜드 마케팅 솔루션

브랜키드(BranKit) 런칭

브랜드 메시지 개발부터 로고 디자인,
명함 제작, 미디어&콘텐츠 실무까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보통 브랜드를 위한
컴팩트 솔루션, ‘브랜키트’ 출시